2008년 06월 05일
실루엣
원래 웹진에 보내드렸던 원본이에요. 웹진에서는 조금 에러가 있어서 소장용으로 올려 둡니다 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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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끊는 그 순간의 편지에서도 베르테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여신이 라이플의 먼지를 털어 그에게 전달했다는 미미한 메시지에 그는 그녀의 손길이 닿았을 라이플에 천 번도 넘게 키스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손에 죽음을 받고 싶었던 그에게,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을 전한 것이다. 그리고 빨리, 천천히, 리드미컬하게 베르테르는 방아쇠를 당긴다. 아! 짧은 외마디 비명속에 그의 뇌는 이미 엉망진창으로 뚫려 있었을 것. 짧은 2~3초만에 한 사람의 인생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또한, 우연히 시골에서 열리던 한 무도회에 참석, 한 여자에게 반해 송두리째 끝이 난 그의 운명은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이미 한 번의 샷에 다 끝나버린 그를.
외국에서 산 지가 6년이 넘어 간다. 맨 처음에 호주로 떠난 그 순간, 나는 유천의 존재에 대해서도 몰랐으며,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젼으로 가득차 있었다. 무엇을 할 것이다, 무엇이 될 것이다 이런 탁상공란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신나게 유학 생활을 시작했었다. 하지만 버지니아의 유천이 그랬듯, 내 자신도 금방 무너졌고, 성적은 곤두박질 쳤고, 친구는 한 명도 없었으며, 낯선 나라의 낯선 언어가, 그 모든 것에 구역질이 났었다. 한주를 걸러 토했으며, 토함과 동시에 얼굴은 부풀어왔다. 항상 얼굴은 부어서, 새까만 머리칼을 하고 구석에서 공부를 하는 동양애가 나였다. 보통 고등학생이 가졌을 평범한 일상이 나에겐 없었다. 그렇게 대학에 진학했으며, 나는 여유라는 것, 느긋함, 행복 이런 감정에 노출되지 않았었다. 내 마음 속은 새까맣게 타버려, 20대 초반의 여성이 갖고 있는 얼굴이라고 하기엔, 축 처져, 의미 없는 짧은 연애를 반복하며 외로움을 달랬었다. 누구를 사랑하는 일에 서툴렀고, 받는 것도 서툴렀었다. 유천과 함께 겪은 부모님의 갈라짐에도 그리 슬프지 않았음은 내 자신의 인생에 너무 지쳐 있어서일까? 아니면 유천처럼 다른 형제에게서의 책임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나는 그 나라에서 혼자였으며, 혼자임에 고민치 않았다. 항상 혼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웃는 유천이 나도 혼자였다고 말해 주었다. 나도 힘들었다고, 나도 어머니가, 아버지가 그리웠고 혼자임이 싫어 집 안에서 은둔했었다 말했다. 그도 나처럼, 밖에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버지니아의 집을 떠돌아 다니며 라디오와 친구가 되었다 말하던 믹키유천에 한 순간에 반했다. 반했다라기 보다는 끌렸다. 보통 자신과 반대인 사람에게 끌린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사람은 자신에게 익숙한 것에 끌리게 된다. 그것이 나와 유천이었다. 유천과 나의 겉모습은 너무나 다르고, 성별을 논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현재는 너무나 틀리다. 한국의, 아시아의 인기 가수가 된 그는 화려한 장신구와 빛나는 옷을 입고, 멋지고 예쁜 사람들 사이에 둘러 싸여 생활한다고 했다. 나는 조그만 동부의 플랫에서, 하류층의 삶을 살고 있다. 재정적 문제로 휴학, 허드렛 아르바이트를 한 지가 꽤 되었지만, 씩씩하게 일해왔다. 맞지도 않는 싸구려 힐을 사 신고, 열심히 웃고 모자란 손짓 발짓으로 환자들을 대한다. 유천은 자신의 세계에서, 나는 나의 세계에서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간간히, 나는 길에서 멈춰 핸드폰 안의 그를 바라보는 것이다. 귀에서는 유천의 상냥하고 낮은 노래가 들려온다. 그러면 나는 72nd 스트릿 그 한 복판에서, 희열에 떨며 내 공상 안의 유천의 발 밑에 엎드려, 입 맞추는 것이다.
유천은 나의 존재도 모르고, 나는 한 번도 그를 만나보지 못했다. 내가 아는 유천은 TV 에서의, 인터뷰에서의 그가 전부다. 하지만 이렇게도 자신있게 그에게 나를 던졌음은, 베르테르가 그 무도회에서 로테에게 자신의 일생을 약속했던 순간과 같다. 그리고 이제 또 다시 6월 4일. 하늘에서 그를 보내 주셨음에 감사하며, 다시 한 번 유천에게 키스. 다음 6월 4일이 오기까지 짧은 안녕을 고함에, 그의 그리운 실루엣을 그리며 짧게 맺는다. 우리는 다시 4년 전으로 돌아가, 우리가 우리가 되기 전, 그 곳에서 서로를 그리워하면 되는 것이다.
# by | 2008/06/05 00:21 | '08 | 트랙백 | 덧글(43)


